1882년에 로스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은 김청송, 서상륜이 권서인으로서, 성경번역인으로서 한국개신교의 기초를 닦았고 이들의 노력으로 1885년에는 소래교회가 탄생하였으며, 정확치는 않으나 1889년에 언더우드가 의주를 방문했을 때 이미 이 곳에는 자생적 공동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Ⅰ. 서론
하나님께서 오신 방법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요 1:14) 것뿐이었다. 우리의 주께서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음을 믿기 때문에 큰 소망과 힘을 얻는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의 약으로 교회를 청결히 하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엡 1:23; 롬 12:5). 그는
1882년 5월에 한미수호조악이 체결되었으며 그러나 그 종약문 속에 종교의 자유가 포함되어 있지는 아니하였다. 전통적으로 선교의 자유 획득을 조약체결의 관례로 삼고있는 프랑스 정보에서도 한불조약시에 한국의 언어학문, 과학, 법률, 예술 등을 연구하고자 하는 프랑스 사람에게 우호적인 협력을
1882년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가 번역된 것을 시작으로 〈예수강셰일쳔 십칠년〉이 번역되었고, 1887에 최초의 한글 〈신약성서〉인〈예수셩교젼셔〉가 발간되었다.
이들 성서 번역자를 권서인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의 활동과 한글 성서를 통한 한국인들의 개신교 수용으로 인하여 1884년 봄에는
누가복음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며 이 마태 공동체의 율법 준수에 대한 강조와 일맥상통한다. 이 말씀은 곧, 복음이라는 “새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분명하게 재해석된 율법이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모세와 율법과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복음이 지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