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략
<의산문답>의 세계관
허학의 해체
아아 슬프다. 도술이 없어진 지는 이미 오래다. 공자가 죽은 뒤에 제자들이 그를 어지럽혔고, 주자 문하의 끝에는 여러 유학자들이 그를 어지럽혔다. 그의 업은 높이면서 그의 진리는 잊었고, 그의 말은 익히면서 그의 본의는 잃어버렸다. 정학을 부지한다는
2. 집필배경
<의산문답>은 홍대용 생애 말기에 씌여진 글이다. 그는 사상적으로 가장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도달한 새로운 생각들을 <의산문답>을 통해서 제시하였다. 작품의 배경이 된 ‘의무려산’은 조선과 중국의 접경에 있는 명산으로, 홍대용이 연행을 마치고 오는 길에 들렀던 장소이다.
Ⅰ. 실학자(실학사상) 홍대용의 행적
북학파의 학자인 박지원, 박제가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학풍은 유학보다도 군국 경제에 전심하였다. 1765년(영조 41) 숙부인 억(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으로 수행, 베이징에서 엄성 반정균 육비 등과 사귀어 경의 성리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에 대한 자료는 많으나, 순수하게 과학관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동양에서는 과학이 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천시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과학관이 확립되지 못한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서경덕과 홍대용을 중심으로 그들의 과학
역사적인 인물을 상세하게 조사하고 그에대해 평가를 내리는 것은 우리 조원 모두에게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작업을 하면서 많은 토의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홍대용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합의할 만한 사항을 도출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