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농학의 발달에 따른 농서편찬과 농서간행
예나 지금이나 정부가 중요하게 행하는 일은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지방관(勸農官) 및 농업경영자에 대해 기술교육을 베푸는 일이라 하겠다. 조선 전기에 있어 이 작업은 특히 농서의 편찬 및 보급이란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 시대 봉건정
율곡 이이
조선 중기 대표 성리학자
10만 양병설 주장, 국론 통일 등 개혁 제시
벼슬에서 물러난 후 제자 양성에 힘씀
시조로 <고산구곡가>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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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구곡가>
[서사] 1수
高山九曲潭(고산구곡담)을 살이 몰으든 이,
誅茅卜居(주모복거)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즙어, 武夷(무이)를 想像(상상)고 學朱子(
卜居總論 生利』
이와 같은 조건이 고대에도 마찬가지였다면 당시에도 김해는 정치적 조건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해운의 구심점으로 기능하고 있었을 것이다. p. 310 두 번째 문단
이에 비하여 낙동강 상류지역을 비롯한 가야지역 내륙 산간지방은 해운입지조건이 불리하다고 할 수 있으나, 대신 농경의
卜居)하여, 그곳에서 1673년(현종 14)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을 처사(處士)로 지내면서, 고금의 수많은 전적을 쌓아 놓고 독서와 사색, 저술로 일관하였다. 그가 말년까지 정거(定居)하였던 우반동은 유형원이 ‘반계’라는 호를 갖게 된 인연이 있기도 하다. 몰후(歿後) 70여 년 뒤 1694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