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尙道의 성립
『慶尙道地理志』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三韓을 통합하고 비로소 東南海道部署使를 두었다고 하였으며, 그 후에 慶尙晋安東道, 慶尙州道, 慶尙道 등으로 각각 고쳤으나 그 개칭의 연대는 미상이다”고 하였다. 그 개칭의 연대에 관해서 『世宗實錄』地理志에서는 대략 아래와 같이
安東府)에서 목판(木版)으로 간행한 것이 중간본(重刊本)이다.
또한 정문형이 강원도관찰사로 있던 성종18년(1487)에 지방에 흩어져 있었던 제영(題詠) 등 120장을 수집하고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등을 추가하여 제8권으로 편집하여 강릉(江陵)에서 목판으로 추각(追刻)하여 안동에 옮겨 장판(藏
安東府)로 하였다.
명종 27년(1197년)에 남적(南賊) 김삼(金三) 효심(孝心) 등이 주군(州郡)을 겁탈 노략하니 차사(差使)를 보내어 평정하였는데 부(府)가 공이 있다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고, 신종 7년(1204년) 동경(東京:경주)의 야별초 (夜別抄) 패좌(悖佐) 등의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이번
安東府)는 원래 신라의 고타야군인데 경덕왕은 고창군(古昌郡)으로 고쳤다. 태조 13년(930)에 후 백제왕 견훤(甄萱)과 이 군 지역에서 싸워 승리하였는데 그 때 이 군 사람인 김훤평(金萱平), 권행(權幸), 장길(張吉) 등이 태조를 도와 공로가 있었으므로 김훤평을 대광(大匡)으로, 권행과 장길은 각각 대상(
정도전의 삼봉집 中 -불교비판에 관한 저서-
정도전은 신왕조를 개창함에 있어서 가장 공이 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조선 개국 이후 이룬 업적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불교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와 관련된 저술로는 심문ㆍ천답 2편, 심기리 3편, 불씨잡변 20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일련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