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祿山)의 난을 맞아 현종을 호위한 공으로 이씨 성을 사성(賜姓) 받은 허기(許奇)의 10세손이다. 인천 이씨의 시조 이허겸이 식읍 1,500호를 하사받은 곳이 현재의 인천이며, 이후 후손들이 인천에 세거하면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인천 이씨를 권문세가로 발전시킨 것은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李子淵)
시작했다. 개원 24년(736)의 장구령 파면과 이임보 기용, 天寶 3년(744)의 양귀비 책봉, 천보 11년(752)의 楊國忠 등용 등의 실정은 결국 天寶 14년(755) ‘安祿山의 난’ 발생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현종 재위 후기의 혼란한 시대적 배경은 왕유의 삶과 궤를 같이하며 그의 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安祿山) ·사사명(史思明)도 이 곳을 거점으로 하여 난을 일으켰다. (두산백과)
氈笠:조선 시대, 병자호란 이후로 무관이나 병사들이 쓰는 전투형 모자를 이르던 말. 운두가 높고 둘레가 평평하며 둥글다. 흔히 붉은 돼지털로 둘레에 끈을 꼬아 두름
撒(뿌릴, 놓다 살; ?-총15획; sa?,sa?)
각설하고 임충은
安祿山)과 주자(走자)가 온 나라를 개가 짖듯 시끄럽게 하였다. 그것들은 모두 손에 강성한 병권도 잡았고, 몸 또한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호령만 떨어지면 우레와 번개가 달리듯 하고, 시끄럽게 떠들면 안개나 연기처럼 깜깜하게 막히게 된다. 그러나 잠깐 동안 못된 짓을 하다가 결국에는 더러운 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