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청풍김씨 가문은 조선후기 정치사적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 다뤄보겠지만 김식 때부터 서울지역으로 편입하였지만 본격적인 정계활동은 김육(金堉)이라고 볼 수 있다. 한당의 영수인 김육은 학문적으로 소옹학(邵雍學)을 바탕으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정
却說?徒中彈墜下, 放彈的人, 是皇次子綿寧。
각설교도중탄추하 방탄적인 시황차자금녕
각설하고 교도는 탄환을 쏘아 추락해 떨어지니 탄환을 쏜 사람은 황제 차남 금녕이었다.
皇次子時在上書房, 忽聞外面喊聲緊急, 忙問何事?
황차자시재상서방 홀문외면함성긴급 망문하사
황제 둘째 아들은 이
Ⅰ. 들어가며
1. 호락논쟁의 배경
호락논쟁(湖洛論爭)은 18세기 중, 후반에 발생하였다. 그러나 사학(史學)계의 의견을 참고하면 호락논쟁의 맹아(萌芽)가 이미 양란 이후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락논쟁이 기호학파(畿湖學派), 정치적으로는 노론(老論) 내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불행히도 한국의 근대사학은 일제가 한국을 침탈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경영하기 위하여 동경제대 출신의 학자들을 이른바 ‘조선사연구’에 투입하였다. 한국을 식민지로 경영하기 위한 사전준비의 일환이었다. 이들 일제학자들은 역사주의에 바탕을 둔 Ranke의
Ⅱ. 사림의 계보
1. 이이-김장생-송시열
이이 - 김장생 - 송시열’을 연결한 것은, 이이를 중심으로 연결되는 호서지역의 서인들은 김장생 - 송시열로 이어지면서 이이 중심의 성리학 이해와 절의를 중심으로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이를 중심으로 한 학파는 그와 동시대에 교류한 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