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과 남인이 현실적인 정치세력으로 의미를 가지게 되면서부터이다. 이이의 경세론에 관한 주장은 당대에는 선조에 의해 채용되지 않았으나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의 개혁론이 되어 점진적으로 실천의 대상이 되었다. 김장생은 호서서인의 한 사람으로 이이를 이어 송시열로 이어지는 서인계열의 전
조선이 건국되자 새 왕조는 새로운 국토를 결정하는데 크게 고심하였다. 조선의 새 국토는 대전 근교의 계룡산과 지금 서울의 무악 등이 물망에 올랐다. 이 가운데 계룡산이 가장 유력하였다. 태조의 계룡산 정도는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계룡산은 풍수상의 신비성과 신도조성 등으로 인하여 이후 정감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耕作․耕食한다. 토지소유권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인데도 국가가 이를 승인함은 부당하다. 우리는 끝까지 이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지경이 된 것은 일본인의 소행이다. 조선의 지주도 일본인과 한 무리가 되었다.”(조선총독부『조선의 군중』1925).
인정함으로써 신의 관념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것은 타일러의 학설은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종교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고, 또한 원시인에게서 꿈이 그처럼 중대한 경험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두고 논란도 있었으나, 이원론(二元論)의 사고양식을 설명하는 양식으로서 아직도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