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개요
참된 선비로서 존경을 받은 조선조의 선비들이 관직에 대하여 취한 태도에는 상당한 개인차가 있었다. 황희와 조광조가 그랬듯이, 학문의 길에서 업적을 남기는 일보다도 국가의 현실을 바로잡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적극적 의욕을 가지고 관직에 임한 선비들도 있었다. 과거와
年號)를 세우고, 또한 229년 건업(建業;南京)에서 오제(吳帝)의 제위에 올라, 3국의 분립이 확정됨.
삼국시대
유비는 위나라의 땅을 수복하지 못한 채 죽고, 이에 제갈량은 북방의 수복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몇차례북벌에 나서나 실패.
제갈량은 234년 오장원 전투 중 과로로 병사.
魏에서는 사마 의(司
年號)를 세우고, 또한 229년 오제(吳帝)의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여기에 3국의 분립이 확정되었다. 3국 가운데 화북(華北)에 있던 위는 병호제(兵戶制)둔전제(屯田制)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 등을 실시하여, 군사적경제적 기초를 공고히 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 후 위에서는 사마의(
주원장 [朱元璋]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고, 재위연호(在位年號)에 의해 홍무제(洪武帝)라고도 한다. 호주(濠州:安徽省 鳳陽縣)의 빈농 출신으로, 17세에 고아가 되어 탁발승(托鉢僧)으로 지내다가 홍건적(紅巾賊)의 부장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어 원(元)나라 강남(江南)의 거점
호칭하던 유비는,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칭하여 성도(成都)에 도읍하고, 한제(漢帝) 또는 촉한제(蜀漢帝)라 칭하였다(221). 손권은 처음에 위의 오왕(吳王)으로 봉해져 있었으나, 222년에는 스스로 연호(年號)를 세우고, 또한 229년 오제(吳帝)의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여기에 3국의 분립이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