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태 조주 원장과 마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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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명태 조주 원장과 마수 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주원장 [朱元璋]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고, 재위연호(在位年號)에 의해 홍무제(洪武帝)라고도 한다. 호주(濠州:安徽省 鳳陽縣)의 빈농 출신으로, 17세에 고아가 되어 탁발승(托鉢僧)으로 지내다가 홍건적(紅巾賊)의 부장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어 원(元)나라 강남(江南)의 거점인 난징[南京]을 점령하였다. 그뒤 각지의 군웅들을 모두 굴복시켜 명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다. 동시에 북벌군을 일으켜 원나라를 몽골로 몰아내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한민족(漢民族)의 왕조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의 확립을 꾀하였다. 중앙에는 1380년 중서성(中書省)을 폐지하여 육부(六部)를 독립시키고 도찰원(都察院)·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를 설치하여 이들 기관을 황제 직속하에 두었다.
지방에도 포정사사(布政使司:行政)·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軍事)·안찰사사(按察使司:檢察)를 병립(立)시키고 이들을 중앙에 직결시켜 황제는 이 통치기구 위에 군림하여 절대권력을 장악하였다. 또, 24인의 황자(皇子)를 전국의 요지에 분봉(分封)하여 제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한편, 농민통치에도 힘을 기울여 전국의 농촌에 이갑제(里甲制)를 설치하고 부역황책(賦役黃冊)과 어린도책(魚鱗圖冊)을 만들도록 하여 조세·부역의 징수를 공평히 하고 정책의 침투를 꾀하였다. 그러나 그가 꾀했던 군주독재권의 강화는 공포정치에 의해 실현되었기 때문에 만년에 고독하게 살다 병사하였다.
명 태조 주원장과 마수영
안휘호주(安徽濠州)출신의 주원장(1328~1398)은 중국 명나라의 개국황제로 중국 역사상 유일한 빈민출신의 황제이다. 항우와도 비할 수 없을만큼 출신이 비천했다. 17세에 고아로 되어 중으로 지내다가 25세 때 곽자흥(郭子興)이 이끄는 봉기군인 홍건군(紅巾軍)에 가담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무수한 전투를 치르고 무수한 승리를 이룩하였다. 16년의 전쟁 결과 1368년에 명나라를 세우고 황제로 등극하여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다. 이렇게 주원장의 일생은 전기적 색채가 다분한 파란곡절 많은 인생이었다.
주원장의 인생역전
주원장에 대해 세인들은 지주계급의 걸출한 정치가이자 군사가라 칭송하는 한편 또한 그의 포악무도함에 혀를 내두른다. 하지만 그의 옆에는 마음이 비단결보다 더 부드럽고 인자하며 너그러운 마황후-마수영(馬秀英, 1332-1382)이 있었다.
마수영은 곽자흥의 양녀였다. 그의 아버지 마공(馬公)은 곽자흥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죽으면서 친구에게 딸을 맡겼다 한다. 마수영은 영리하고 시문에 능한 동시에 성품이 어질고 다정다감하여 양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1352년,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생계를 유지해 가던 주원장은 곽자흥을 찾아 그의 무리에 가담할 것을 청했다. 곽자흥이 보니 앞이마가 튀어나오고 돼지 코와 말상(馬像)에 곰보의 괴이한 얼굴과 험상궂게 생긴 모습이 흉측할 정도여서 호감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곽자흥은 이런 모습이 어쩌면 오히려 적도들을 부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점차 그를 중용한 나머지 양녀 마수영과 혼인시킨다.
못생긴 남편과 발이 큰 아내
주원장과 마수영 사이에 이런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결혼한 그날, 주원장은 마수영의 큰 발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봉건사회 당시 중국에서는 미인의 기준이 발이 작은 것이어서 어릴 때부터 발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인위적으로 전족(纏足)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수영은 발의 크기가 정상이었다. 원래 마수영의 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냈고 어머니 또한 일찍 돌아가셨기에 집에는 그를 보살필 사람이 없었고 발을 감지도 않았다. 하여 어릴 때 그의 별명은 ‘마대각(馬大脚)’이었다. 남편이 자기 큰 발을 보고 놀라는 것을 눈치 챈 마수영은 당당히 “저는 당신의 흉측한 모습도 꺼리지 않는데 당신도 제 발이 크다고 나무라지 마세요. 서로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갑시다.”이렇게 말했다 한다.
사랑의 증표
결혼 후, 두 사람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달콤한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주원장이 거듭 큰 승리를 이룩하고 곽자흥의 신뢰를 받음에 따라 많은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도 자아냈다. 그 중에서 곽자흥의 두 아들에게서 오는 질투가 가장 컸다. 아무런 재능도 없는 두 형제는 주원장이 전쟁터에서 포획한 재물을 혼자 삼킨다는 등 온갖 나쁜 말을 다 했다. 곽자흥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더니 점차 아들들의 말을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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