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 보고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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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삼국지연의

중국 원나라 때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 ; 1330?~1400)이 지은 장편 역사소설로서 중국 4대기서(四大奇書;수호전(水滸傳),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의 하나로, 원명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 하며, 또한 삼국의 정사(正史)를 알기 쉬운 말로 이야기한 책이라는 뜻에서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라고도 부른다. 후한(後漢) 말부터 위(魏)· 촉(蜀)·오(吳) 삼국의 정립시대(鼎立時代)를 거쳐서 진(晉)나라에 의한 천하통일에 이르는 역사를, 유비(劉備)·관우(關羽)·장비(張飛) 등 세 인물의 무용(武勇)과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지모(智謀)를 중심으로 하여, 정사(正史)인 진수(陳壽)의 《삼국지》를 기초로 한 70%의 사실에 30%의 허구를 섞어서 부연(敷衍;演義)한 소설이다.

중국 후한(後漢)이 멸망한 후 위(魏)오(吳)촉한(蜀漢) 등 3국이 정립(鼎立)했던 시대.
184년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후한 왕조의 권위는 붕괴하여 동탁(董卓)이 낙양(洛陽)으로 입성하여 환관(宦官)을 주멸하고, 황제의 폐위를 감행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동탁 토벌의 군이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산동(山東)에 있던 조조(曹操)도 189년에 군사를 일으켜 황건적을 격파하고 동탁을 토멸하여 후한의 헌제(獻帝)를 옹립해서 기주목사(冀州牧使) 원소(袁紹)와 화북지방을 양분(兩分)하였다. 양자(兩者)는 202년 관도(官渡)에서 자웅을 결하였으나, 이 싸움에서 승리한 조조는 화북지방의 지배권을 거의 확립하였다. 한편, 형주목사(荊州牧使) 유표(劉表)에게 식객으로 있던 유비(劉備)는, 제갈량(諸葛亮)의 협력을 얻어 형주를 빼앗아 손에 넣고 오(吳)의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조조의 남하를 저지하였으며, 211년에는 익주(益州)를 공략하여 이 지방을 빼앗았다. 그 후 오의 손권은 유비와 싸워서 형주를 손에 넣었으며, 거의 양쯔강의 중하 유역을 세력 하에 두었다.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후한의 헌제를 강압하여 제위를 양위케 하고, 낙양에 도읍하여 위국(魏國)이라 칭했다. 그 전년에 한중왕(漢中王)을 호칭하던 유비는,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칭하여 성도(成都)에 도읍하고, 한제(漢帝) 또는 촉한제(蜀漢帝)라 칭하였다(221). 손권은 처음에 위의 오왕(吳王)으로 봉해져 있었으나, 222년에는 스스로 연호(年號)를 세우고, 또한 229년 오제(吳帝)의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여기에 3국의 분립이 확정되었다. 3국 가운데 화북(華北)에 있던 위는 병호제(兵戶制)둔전제(屯田制)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 등을 실시하여, 군사적경제적 기초를 공고히 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 후 위에서는 사마의(司馬懿)가 중심이 되어 이를 격퇴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사마씨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사마소(司馬昭)는 263년 촉한을 멸망시킨 공적으로 진왕(晉王)에 봉해졌으며, 265년에는 그의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위제(魏帝)를 강압하여 제위를 양위받고 진(晉)나라를 세웠다. 이 사람이 서진(西晉)의 무제(武帝)이다. 무제는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재차 중국을 통일하였다.

작업중 나관중(1330-1400)은 이름이 본(本)이고, 관중(貫中)은 그의 자이며, 호는 호해산인(湖海散人)으로, 전당(錢塘) 사람이다. 중국 원말(元末)명초(明初)의 소설가극작가로 본적은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이다. 1364년에 살았다는 기록 외에 전기(傳記)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최하급의 관리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관중은 원말명초의 혼란한 세상을 살았던 사람으로, 원말(元末) 시기에는 반원운동에 참가하였으며, 명나라가 들어선 후에는 정치생활을 청산하고 소설과 희곡 창작에 몰두하였다. 나관중은 희곡과 악부를 썼지만, 중요한 업적은 소설창작이다. 나관중이 저술한 작품 중에서 현존하는 작품으로, 소설에는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 {수당양조지전(隋唐兩朝志傳)} {잔당오대사연의전(殘唐五代史演義傳)} {삼수평요전(三遂平妖傳)}이 있고, 희곡에는 {조태조용호풍운회(趙太祖龍虎風雲會)}가 있다.

그 당시의 사료 하나하나를 모아 삼국지를 만들어낸 진수는 촉의 파서군 안한현 출신으로 제갈량 북벌의 말기에 태어났다. 그는 촉의 뛰어난 문재였으며, 당대의 문사인 초주를 스승으로 섬겨 글을 배웠다. 초주는 경사에 능한 인물로 263년 종회의 촉 침입 당시에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위니라에 항복할 것을 권해 촉 정권의 평화이양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진수는 태학에서 학업을 하면서 매우 뛰어나 공자의 제자인 자유, 자하에 비유되기도 했다. 정사삼국지로 불리는 진수 삼국지는 위서(30권) 와 촉서(15권) 와 오서(20권) 로 이루어져있다. 이 방대한 분량을 직접 사료를 수집해 집필하는 것만 봐도 진수의 능력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일생동안 저술이 풍부하고 그 중심에 역사학이 있었다. 그의 역사관은 유심주의적 역사순환론으로 말할 수 있는데 진한방사 유생이 창립한 “五德相生(오덕상생)”학설을 계승하였다. 그 설은 실제 음양오행설을 정치 중에 이용한 것으로 실질적으로 “五德相生受命(오덕상생수명)”으로서 선양을 통해 천하를 얻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덕의 순환이 순서에 의해 전개되는 것으로 일종의 순환론, 예정론, 동력론과 관련되어 있다. 진수는 또 천명론을 믿고 선양하였다 그것은 대체로 스승인 초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초주는 測字算命(측자산명)과 유사한 놀이로 길흉을 정하는 몰이를 즐겼다.
진수의 유심주의 역사순환론 외에도 일정 부분에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품평에서 보면 역사적 작용을 지나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일정 정도에서 인민 군중의 사회 역사에 대한 영향을 인식하고 비교적 중심사상을 강조하며, 擧賢任能(거현임능-현인을 뽑아 쓰고 유능한 사람에게 일을 맡긴다.) 사상을 견지하기도 한다.
그는 삼국지에서 역사인물과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특히 제갈량에 대한 견해는 긍정적이었다.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예법 규칙을 나타냈으며, 관직을 간략하게 하고 권부의 제도를 느슨하게 하였으며, 성실한 마음을 열고 공정한 정치를 실행했다.”고 평하여 그의 재량을 높이 평가했다. 이렇든 그는 삼국지라는 책에 자신의 견해와 함께 역사적 사실, 그리고 허구를 적절히 배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