府尹爲防禦使。
수철소동경명목 강개봉부위변주 부윤위방어사
곧 동경의 명목을 철수하고 개봉부를 변주로 강등시키고 부윤을 방어사로 삼았다.
遼主改服中國衣冠, 百官起居, 悉仍舊制。
요주개복중국의관 백관기거 실잉구제
요나라 군주는 중국 의관 복장을 바꾸고 백관의 기거를 모두 예전 제
府尹)을 삼고, 황보인(皇甫仁)과 이숙치(李叔)로 사헌부 장령을 삼고, 조극관(趙克寬)과 남지(南智)로 사헌부 지평을 삼고, 집현전(集賢殿)에 5명의 관원을 더 두었다. 또 이의생(李義生)으로 원윤(元尹)을 삼으니, 의생은 공정 대왕(恭靖大王) 궁인(宮人)이 낳은 아들이었다.
세종은 태종 사망 이후 국왕으
우리 나라에서 오랫동안 실시하지 않았는데, 부윤(府尹) 고약해(高若海) 등이 고례(古禮)에 의거하여 이를 실행할 것을 요청하였다. 태종 때에 친영의 예를 실시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나이 어린 처녀도 모두 결혼을 시킨 것은 친영을 행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어려운 이유란 무엇인가.”
府尹)으로부터 동정을 받게 된다. 때마침 부윤과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홍해의 원님인 이태수가 경주 부윤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단정한 미모의 최낭을 보고 흠모의 정을 품게 된다. 결국 이태수는 자신의 계집종을 대신 바치는 조건으로 최낭을 속량(贖良)하여 주고 소실로 삼고자 한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