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이광수의 변절 및 친일 행각
2.2.1. 이광수의 변절
1917년 이미 무정으로 유명해진 이광수는 1919년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이를 갖고 상하이로 건너간다. 그러나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의 속사정은 춘원 같은 천재의 눈으로 볼 때 근대화된 문명국가인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
세계적으로 30년대는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반동적 움직임이 도처에서 활개를 치던 시기이다. 이와 같은 세계사적 상황 속에서 우리 나라에서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조건이 한 걸음 더 악화되었다. 만주사변(1931)에서 중일전쟁(1937)을 거쳐 태평양 전쟁(1941)으로 확산된 일제 군국주의의 전쟁광적 에스
李光洙) 주요한(朱耀翰) 등과 함께 문명을 떨쳤다.
한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기자로 일을 하다가 1929년 월간지 《삼천리(三千里)》를 창간 주재하였고, 1938년 《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을 발간하여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1939년 총독 미나미[南次郞]의 <새로운 동양의 건설
李光洙, 1892년 3월 4일 ~ 1950년 10월 25일)는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문학가, 시인, 평론가, 번역가이며 애국 계몽 운동가의 공로가 있으나, 최남선과 함께 거론되는 변절한 친일파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차남 안원대군의 후손이기도 하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
李光洙)와 김동인(金東仁)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조선인이 조선어로 쓴 문학(文學, literature)을 조선 문학으로 규정하고 작가의 상상력과 핍진성, 섬세한 묘사 등을 문학의 주요 요소로 내세웠다. 이광수는 자신의 창작론에 근거하여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1917)을 발표하여 조선 문단에 큰 반향을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