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湖問答)』,『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도 그의 교육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교육은 한자와 더불어 유교가 들어온 이후 서구의 학문과 교육 방법이 도입되기까지는 유교가 교육의 주된 내용을 이루어 왔다. 이이는 유교적 전통이 우리 민족의 삶을 강하게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유교적 교육
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했다. 1576년에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 심화되자 그의 중재 노력이 실패하고 건의한 개혁안마저 묵살되자 낙향하여 본가와 처가를 오가며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후학양성에 힘을 썼으며 향약과 사창법을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사단칠정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9년)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우리나라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대표적 교육사상가 중 1명을 선정하여, 그의 생애와 교육사상의 특징을 설명하시오.
Ⅰ.서론
조선의 대부분의 학인들이 학자로 대성하거나, 벼슬길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겨 관료로 성공하거나, 제자를 키우는 일 등 한 면에서 성취를 이루는 데 이에 비해 율
1. 율곡 이이의 생애
이이(李珥)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ㆍ석담(石潭)ㆍ우재(愚齋)이다. 1536년(중종 31) 음력 12월 26일에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의 셋째 아들로 외가인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1548년(명종 3) 13세의 나이로 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