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롯한 토지제도의 문란, 통치 질서의 이완, 하극상의 사회상 등을 지적하였다. 李丙燾. 「相剋期의 高麗」『朝國史 中世篇』 震檀學會 1961
물론 자연발생적 농민 봉기로 파악한 것 등은 기전외 이래의 견해라고 하겠으나 천민봉기의 경우에는 농민과는 달리 신분해방운동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學會, 2001.을 참고할 것.
일본이 북수남진론의 외교노선을 취하게 된 데에는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을 통해서 그들의 중국 대륙 진출을 좌절시키고, 대한제국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러시아의 존재를 강하게 의식했던 것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쪽으로의 대륙진출이 러시아에 의해
學會)를 통하여 발표되고 있던 무수한양의 논저를 민족사학이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식민사학 나름의 이론인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과 타율성론(他律性論)과 정체성론(停滯性論)의 역사이론에 대하여, 민족사학이 어떤 연구조직도 없이 개인의 힘으로 대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구의
1. 序 論
1170년 무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고려 사회는 문벌 귀족의 해체, 지방의 중소지주 계층의 부상, 민중의 역량과 의식의 성장 등 고려 전기와는 다른 변혁의 양상을 보였다.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문신을 학살하고, 의종을 폐위한 후 무신정권의 시작을 알렸다. 이규보는 무신의 난이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