馬融) ·정현(鄭玄) ·가규(賈逵) 등이 나타났고,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소학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이와 같이 한의 훈고학은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밝혀 원래의 의미를 밝혔는데 이런 훈고학의 흐름은 삼국 ·육조(六朝)를 거쳐 당나라까지 이어졌으며, 당나라의 공영달(孔穎達) 등이
1. 정명이란
공자가 정치를 하게 되면 반드시 먼저 하겠다고 한 「正名」이란 무엇인가? 후세의 設 들을 살펴보며, 첫째, 漢代의 馬融은 「백가지 일의 名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즉 百事의 명이 그 實과 부합하도록 名實相符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종자도 「名과 實을 相須하게 하는
馬融의『史記集解』기록을 근거로 든 것이다.
라고 보았다. 따라서 『魏志』「東夷傳」의 ‘箕子의 후손인 準王이 衛滿에게 정권을 탈취 당한 후 海中으로 도망하여 그 스스로 韓王 이라고 칭했다’라는 기록의 海中을 한반도 남한지방으로 비정하고 가장 유력한 근거로 後漢 시대의 王符가 지은 『
한대 경학
제국의 논리와 제국의 학문
1. 한 제국의 등장과 경학
한 나라 이후의 유가(儒家) 사상은 중국의 정치 현실을 지배해 온 사상으로 농경문화 중심사회에서 가장 적합한 통치 이념으로 받아 들여졌다. 하지만 유학은 표면적인 정치 이념이고, 중국 역사의 실질적인 힘은 법가(法家)적인 통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