散文에 있어서 우리 나라에서 본격적인 文章을 한 것은 三國時代 이후의 일이다. 우리는 選文冊子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것들에 선발?수록되고 있는 문장들도 대부분 新羅 것에 편중되고 있으며 ,『三國史記』와 같은 史書조차도 新羅를 계승한 高麗의 史官에 의하여 기술된 것이므로 그
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유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열전에 그가
騈儷文體) 대신 당(唐)ㆍ송(宋)에서 발달한 고문체(古文體)를 수용하였다. 고문체는 문장에서 중복되는 수식어를 쓰지 않아 문장이 간결할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 쓰는 효과가 있는 문체여서 역사 서술을 하는데 적절하였다. 그리고 송나라에 사신으로 행차했을 당시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자치통
騈儷文體)에서 당·송 시대의 고문체(古文體)를 수용하려 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저자 서긍(徐兢)은 그를 고금에 밝고 글을 잘 짓는 박학강식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의종이 즉위한 뒤 낙랑군 개국 후에 봉하고 『인종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죽은 후 1153년 중서령이 추증되었으며 인
사실에 불만을 품은 낙방생 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변려문(騈儷文)보다 고문(古文)을 더 중시하는 결정적이고 획기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중국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왕안석(王安石)과 소식 같은 유능한 젊은 문인들을 칭찬하고 독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