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조장서 최치원 작가소개 초조장서 작품개관 초조장서 작품 서사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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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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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초 조 장 서(招 趙 璋 書)
1. 작가소개
최치원(857∼?)은 신라 말의 6두품 출신의 학자로 단순히 문장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유교를 비롯한 불교, 도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자는 고운·해운이고 경주 최씨의 시조이다. 869년(경문왕 9)에 13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879년(헌강왕 5)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장(表狀)·서계(書啓) 등을 작성했다. 880년 고병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고,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 군무(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 20권으로 엮어졌다. 특히 881년에 지은「격황소서」는 명문으로 손꼽힌다.
885년에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서서감지사가 되었고, 대산·천령 등지의 태수도 역임하였다. 894년에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한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렸으나, 시행되지 않자 정치에 뜻을 버리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6두품이라는 출신의 신분적 한계와 난세를 비관했던 것이다. 그 후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한편 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유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열전에 그가 입전(立傳)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계원필경」·「사산비명」·「법장화상전」이 있으며, 『동문선』에 실린 시문 몇 편과 후대의 사적기(寺跡記) 등에 그가 지은 글의 편린이 전한다.
2. 작품 개관
「초조장서」는 『동문선』제 49권에 실려 있으며, 중국 당나라 희종시대에 일어난 황소의 난과 관련된 격문(檄文) 전쟁 중에 적군에게 자기 쪽의 위엄을 내세우고,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위축하게 만드는 글의 종류.
의 하나이다. 당나라 때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병(高騈)이 토벌군 총사령관이 되었는데, 이때 최치원이 참가해 여러 격문을 썼다. 「초조장서」격문은 황소에게 가담한 조장(趙璋)에게 보낸 것으로, 그로 하여금 황소를 설득하게 만들어 전쟁을 끝내고자 한 전략에서 쓴 것이다. 상대는 명분이 없음을 밝히고 있으며, 이쪽은 힘과 지혜를 두루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덕도 갖추었고, 또 하늘이 도운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적장에게 항복을 권유하고 있다.
3. 작품 서사의 배경 : 황소의 난
황소의 난은 당나라 말기 연간(875∼884)에 일어났다. 당나라 말기에는 지방 번진의 세력이 늘어나고 중앙관리의 당쟁과 환관의 횡포가 겹쳐서 지배력이 흔들리고, 인민에 대한 수탈도 강화되어 토호나 상인층도 반왕조의 경향으로 돌아섰으며. 또한 전국에 기근이 내습하여 사회적 불안은 절정에 달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 소금의 암상인으로서 반체제적 활동을 해오던 산둥[山東]의 왕선지(王仙芝)·황소(黃巢) 등이 난을 일으켰다. 선지가 죽은 후 황소는 그 잔당들을 모아 지도자가 되었고, 그들은 혈연으로 맺어진 자와 종래부터 부하였던 자들을 핵심으로 하여 파산 농민이나 유랑의 무리, 반사회적인 분자들도 끌어넣어 약탈활동을 하며 산둥 및 후난·후베이로 대이동을 전개하여 880년에는 뤄양·창안 등을 함락하자, 희종은 쓰촨으로 망명하였다.
황소는 장안에 스스로 정권을 세우고 국호를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이라 부르고 항복한 관리도 기용하여 통치를 굳히려고 하였다. 그러나 관중[關中]의 정권은 경제적 기반이 없어서 당나라 왕조를 돕는 투르크계 이극용(李克用) 등 토벌군에게 격파되어 3년 후에는 창안으로부터 동방으로 퇴각하여 이듬해 산둥의 타이산산[泰山] 부근에서 자결하였다. 이 난은 고대적인 당나라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