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왔는데, 그 뒤 신묘
비문의 세계> p255~256
Ⅲ.광개토왕비에 보이는 정복활동과 대외관계
1.정복활동
광개토대왕은 위대한 정복군주인 동시에 유능한 통치자였다. 광개토대왕대 고구려의 정복전쟁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실질적인 농경지의 확보와 민호의 획득을 통한 국력배양에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전제왕권의 자
예를 들면 추모왕이 알을깨고 태어난 천제지자라는 기술은 신화적이지만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는 것은 구체적인 것이다.
그러한 조상왕의 권위는 혈통을 통해 후손에게 전달되고 광개토왕을 거쳐 장수왕에게까지 전이되어 왕통보는 조상왕과 후손왕을 동격화 한다.
비문이 신화적인 추모왕의 유례
고구려 동북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기사가 영락 6년에 백제 정벌의 여파로 이해하는 동시에 백신토곡을 백제와 인접한 한강 유역이나 강원도 지방의 예지로 간주하는 견해를 취한다면 이 기사의 성격은 드러난다. 고구려가 소백산맥 이남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남한강 상류의 충
Ⅰ. 서 론
1. 비문의 소개
1-1. 능비 건립 시기
광개토왕비는 광개토왕 (고구려 제19대 임금) 의 아들 장수왕이 광개토왕 사후 3년간의 상을 지내고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아버지의 망해를 능묘에 매장했고 그 옆에 세운 비이다. 이 비문 속 광개토왕의 정식 시호는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