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은 옛 신라의 도읍이던 서라벌 남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 금오산(金鰲山)이라고도 한다. 서쪽에는 선도산, 벽도산, 옥녀봉이 솟아 있고 북쪽으로는 독산, 금강산, 금학산 등이 나란히 솟아 있다. 동쪽으로는 낭산, 명활산이 솟아 있으며 멀리 토함산 연봉이 겹으로 둘러막고 있어 서라벌은 천연
경주 귀족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지탱하기 위한 세금의 지나친 수탈에 따른 농민의 반란 등은 결국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에 대한 지방 호족세력의 등장을 야기시켜 완산주(完山州, 全州)에서는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 892년)를, 송악(松岳, 開城)에서는 궁예(弓裔)가 후고구려(後高句麗, 901년)
경주의 역사경관이 도시적 특성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斯盧六村이 발전하여 斯盧國을 형성하고부터 이다. 이들은 혈연공동체인 씨족국가로서 주변의 辰韓 小國들과 대항하기 위하여 모여 살게 되었고 도시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경주시 역사경관의 모체가 되었다.
신라는 국가 開創
세계 어느 나라나 각기 자국의 문화유산의 보존 전승을 위해 나름의 방법을 동원, 심혈을 기울인다. 지상에 나타난 문화유산이나 동산의 문화유산은 실체가 있어 큰 문제는 없지만 지하에 묻혀 있는 매장문화재의 보존이 항상 문제를 안고 있다. 지하에 있기 때문에 발굴조사나 기타 방법으로 확인되지
신라가 왕권국가로서의 체제를 제대로 갖추게 되는 것은 지증왕(智證王)과 법흥왕(法興王) 때에 이르러서이다. 지증왕(500~514년) 때에는 마립간(麻立干)대신에 중국식 왕호(王號)를 사용하여 왕위세습 및 정치체제를 확립하였고 한편으로는 우산국(雨傘國)을 정복하여 대외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