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력을 가지고 있던 군장국가의 장인 군장들을 고구려세력하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부여된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가들은 대가와 소가로 나뉘었으며 신분과 권력상에서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금경숙(1994) “고구려 초기의 중앙정치구조- 제가회의와 국상제를 중심으로”,[한국사연
제가 성립될 초기에는 왕족은 진골신분에 속해있었다. 그 후 성골이 생겨나면서 성골신분의 왕족과 진골신분의 왕족으로 나뉘게 되었다. 진골과 성골이 나뉘게 된 것은 진평왕 대에 와서 진평왕의 직계존비속을 석가족으로 표현하는 와중에서 진평왕의 직계존비속이 성골로 격상되고, 여타의 왕족은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하여 일정한 정치적인 역할을 한 지배층이라고 하겠으며, 그들의 지위는 정치적 진출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하겠다.
골품제가 성립되고 관등제가 완성되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귀족회의의 전신인 남당회의에 5세기 전반까지에는 극히 한정된 지방세력도 참여하였지만 5세
고구려를 선두로 삼국은 왕권중심의 중앙집권적 고대왕국으로 발전되었다. 각 지방의 지배세력들은 왕권에 복속되는 대신 그들은 지배자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하여 관료제도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정치제도는 전 지배계급이 결속할 수 있게 편제된 것이며, 왕권의 절대화를 통해 완전히 중앙집권적인
고구려와 별도로 종통을 삼아서 동명왕의 묘를 세웠다면 다른 나라의 어머니를 배향하거나 자기 어머니를 별도로 제사지냄은 부당하다. 온조의 처신은 모두가 잘못됐다."
권근은 조선 왕조 창업 후 유교적 강상 확립을 통해 왕권 강화를 추구했던 예학의 대가인 성리학자였다. 그는 이미 그의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