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를 사뇌가와 민요로 세분하여 논의한 결과를 수용한 것인데, 향가가 우리말로 된 최초의 기록문학이고 또한 개인 창작시라고 하는 데 의의를 두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황패강은 향찰표기만이 향가가 된다는 등식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현전 향가를 수록하고 있는 삼국유사가 고려때인
Ⅰ. 고려향가의 시대배경
고려전기의 지배층은 두 갈래로서 한쪽은 서라벌의 전통을 이은 문신귀족이다. 이들은 신라 육두품 출신으로서 신라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다가 고려가 들어서자 최고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는 신분을 획득하고 문화 창조를 주도했다. 골품제 철폐를 요구하던 오
Ⅰ.고려향가와 『균여전』
1.향가의 지속과 변이
신라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던 향가는 고려시대에 들어서서도 일정기간동안 존속하였다. 이것은 문화 담당층이 연속되면서 고려 전기의 사회와 문화가 신라의 경우와 근본적인 동질성을 지니고 있었음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문학적인 면
1. 향가(鄕歌)의 개념
원래 향가는 넓은 의미로 중국의 한시에 대한 우리의 노래를 의미하는 용어였으나, 6세기 삼국통일에서 13세기 고려 중기까지 향찰로 표기된 시가장르만을 지칭하게 되었다. 현전하는 향가는 총 25수로서 신라 향가 14수는 「三國遺事」, 고려향가 11수는「均如傳」 고려시대에 지
Ⅰ. 향가계 고려가요 도이장가의 작품해제
1120년(예종 15년)에 고려 예종이 지은 향찰식 표기의 가요이다. 신승겸(申崇謙)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 그 제작 동기에 관한 소상한 기록과 함께 작품이 전한다. 창작 경위에 관해서는 그 밖에도 <고려사> 권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