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파가 유형원을 계승하면서 토지 및 행정기구 등 사회제도의 개선에 치중한다는 측면에서 일명 '경세치용학파 經世致用學派'라 지칭하고, 지배계층인 노론계열의 북학파가 상공업의 유통과 일반기술의 발전 등 물질문화의 발달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용후생학파 利用厚生學派'라 지칭하기도 한다.
사상을 가졌던 중상주의자(重商主義者)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허생 스스로가 장사꾼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자신의 장사하는 방법이 백성을 해치는 도리라고 하였으며, 번 돈을 바다 속에 넣어버리고 가난한 옛집으로 돌아오는 등 일련의 사건들은 사회 사상의 변질을 정확히 관찰하면서도 작가
Ⅰ. 실학(실학사상)의 개념
공리, 공담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송유의 성리학을 망국학이라고까지 혹평하고 자기들의 고증학의 특징을 표시하였으므로, 고증학풍은 드디어 일종의 민족문화 운동의 선구적 형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증학은 ‘실사구시학’의 대명사로 불려졌으며, 혹
경세치용(經世致用)ㆍ이용후생(利用厚生)ㆍ실사구시(實事求是)를 기치로 하는 현실주의적 학문, 곧 실학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들은 각각 학문의 분야를 달리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념과 방법에 있어서 모두 당시의 주자학적 세계주의 속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차원을 지향해서 실용(實用)ㆍ실
사상가에 비교하면서, 그들에 못지않은 민권사상가라고 평가하였다. 김용걸, 「조선후기 실학사상에 대한 회고와 전망」,『동양철학연구 19』, 동양철학연구회, 1998
한편, 한말의 각 신문에서도 다산에 관하여 소개하였다. <황성신문>은 1899년 4월 17일부터 2회에 걸쳐 다산의 경제사상을 단편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