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등의 각 방면에서 광범위하고 왕성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고, 이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교양으로까지 확산되어 향유되고 있다. 이에 본문에서는 작가로서의 정약용을 논하는 데 있어 그의 생애에서 실학 정신이 어떻게 발전되고 표현되었는가에 집중해서 탐구하도록 하겠다.
2. 실학의 개괄
문학을 아주 배척하는 일이다. 여러 가지 우리나라의 옛 문헌이나 문집에는 손도 대지 않으려 하니 이거야말로 병통이 아니고 무엇이냐. 사대부 자제들이 우리나라의 옛일들을 알지 못하고 선배들이 의론했던 것을 읽지 않는다면 설사 그 학문이 고금을 꿰뚫고 있다 해도 저절로 소홀하고 거친 것이 될
다산은 학문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다가 1836년 2월 22일 고향 마현(馬峴)의 자택에서 75세를 일기로 자신의 저작물을 수록하였다.
Ⅱ. 다산정약용의 정치사상
다산의 정치사상은 다산의 독창적인 사상이었다기 보다는 광범위한 지식 대중들의 생각을 그가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완전한 자유
다산정약용이다. 그는 문학, 철학,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에 못지않게 교육의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공적을 남겼다. 여기서는 이러한 다산의 생애와 실학의 거구(巨軀)라 할 수 있는 정약용의 실학사상에 대해 본론에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1. 실학사상에 나타난
실학자와 마찬가지로 당시 사회의 모순이 토지문제에 있다고 보았다. 당시 실학파들은 토지제도의 모순을 대토지 소유의 발달로 인한 농민들의 토지 상실과 농민들에 대한 봉건국가와 지주들의 가렴주구에 있다고 보았다(오문환, 2002: 8~9).
젊은 다산은 성호의 제자인 청당 이중환, 순암 안정복의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