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품제가 신라사에 미친 영향골품제는 앞에서 알아보았듯이 신라사회의 신분제이다. 그 성립시기를 놓고도 여러 견해가 있어 왔다. 그러나 봉평비와 냉수리비의 발견으로 인해 법흥왕7년에 율령을 반포하고 6세기초에 골품제의 대강이 완성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골품제가 신라사회에 미친 영향
신라시대의 골품제
이것은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와 여타의 사람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로 구분된다. 원래 신라는 경주에 자리 잡은 사로국의 6부를 중심으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면서 성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복속된 소국의 지배층 가운데 일부를 경주로 이주시켜 지배층인 6부에 편입
골품제도는 처음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왕경내의 일반 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頭品制)가 별개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던 듯한데, 법흥왕(514~540)때에 이 두 계통이 하나의 체계로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골품제도는 성골(聖骨)과 진골(眞骨) 이라는 두 개의 골(骨)과 육두품(六頭品)
신라사회가 중대에서 하대로 변동한 원인은 왕권의 전제주의에 대한 귀족의 반항때문이었다. 그 결과 신라하대는 귀족과 연합하는 방향을 걷게 되었다. 그렇지만 신라사회의 정치·경제의 중심은 진골귀족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골품제가 여전히 강력한 사회원리로 기능하고 있었다. 진골귀족은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