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 골장제(옥저)
시체를 림시 매장하여 가죽과 살이 모두 썩게 했다가, 그 후에 뼈만 추려 곽 속에 안치 한다.
시기
삼국의 형성
삼국의 전성기
삼국의 흥망
2세기
고구려의 고대왕국형성(태 조왕)
3세기
백제의 고대왕국형성(고이 왕)
4세기
신라
고려의 정복지는 모두 원의 일부로 복속시켰지만, 세조 쿠빌라이는 온건책을 채택하여 고려의 국체를 온존시켰으나 자비령 이북의 영토는 몽고에 복속되었다. 또한 원은 국왕 임명권, 정동행성의 설치, 친원 집단의 조성을 통해 고려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정치적 간섭이 시작되었다.
고려의 모든 왕
왕이 즉위하여 공민왕을 강릉부원대군으로 봉하였다. 층목왕이 돌아가시니 고려에서 왕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원에서 충정으로 왕을 계승케하고 인하여 (공민)왕을 머믈러 숙위(궁궐에 머물러 지키는 것)케 하였다. 처음에 충숙왕이 공민왕을 윤택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으므로 충정 원년에 윤택이 이
개혁안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검토하기로 한다.
(1)공민왕원년의 개혁 정책
공민왕은 몽고식의 변발과 호복을 푼 일이었다. 변발과 호복을 풀어 버린 것은 지금까지 원의 지배 하에서 지속되어 온 문화적 복속을 떨쳐 버림으로써 고려왕실의 주권을 재확립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개혁운동도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며 고려의 정치적 모순은 점점 깊어만 갔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공민왕이 즉위하자마자 왕권의 강화와 정치적·사회적 개혁 및 반원친명정책을 골자로 하는 혁신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대내 혁신정치는 추진세력이 지니는 제약성과 세족·권문의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