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원개혁이 성공한 뒤에는 공민왕의 측근세력이 정치세력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면서 점차 와해되어갔고, 이후 고려의 정치는 기존의 권문세족과 이 시기에 새로이 성장한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가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앞서 整治都監의 활동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권문세족과 부원
판도사(版圖司), 병부(兵部)를 전법사(典法司)로 바꾸었다. 그리고 도병마사(都兵馬使)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바꾼 것도 이때이며, 이는 고려의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
또 순마소(巡馬所)라는 기관을 두어 내정을 감시(관리들의 반원활동을 감시)하기도 하였고, 다루가치라는
말자. 지주의 횡포로 우리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耕作․耕食한다. 토지소유권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인데도 국가가 이를 승인함은 부당하다. 우리는 끝까지 이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지경이 된 것은 일본인의 소행이다. 조선의 지주도 일본인과 한 무리가 되었
한국의 국호를 ‘우리나라’로 바꾸자는 파격적인 의견까지 내세우고 있어서 조금 놀랐지만, 현재의 여건을 고려하여 단순히 주장에만 그치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 했다. 또한 ‘통사’에 대해서는 각 시대별 문학들에 대한 연관관계를 밝히는 소중한 과업을 위해 붙인 이름이라 해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