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지역은 이미 유신체제하에서도 끈질긴 저항의식을 표출해 온 사람들이었다. 호남평야를 가진 이 지역은 일제 강점기부터 약탈의 대상이었다. 배제의 역사에 살아온 이들에게 억압된 욕구는 매우 컸다.
특히 이 지역은 타지역에 비해 민주화운동에서 학생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곳
서론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은 오랜 기간의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막을 내리고 군사 독재는 이제 그만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정부는 광주도 다른 지역처럼 쉽게 진압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 운동의 분위기는 고조되어 갔다. 가만히 두고 있으면 안된다는 생각
광주에서만 승인투쟁 혹은 절대적 공동체의 형성이 가능했는지에 대한 의문에 답하려는 연구가 등장한다. 구조적인 접근, 혹은 계급론적인 접근에서는 항쟁의 발발 혹은 항쟁의 원인에 대한 연구 속에 이미 참여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층 민중이라는 이름 속에 내재해 있는 항쟁 주체로
광주시민운동의 한 중심에 서 있지는 아니하였지만, 한 시대의 목격자의 관점으로서 5.18사태에 대한 여러가지 사실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 사건을 통하여 앞으로 우리가 지성인으로서 느껴야 할 교훈과 앞으로 이와같은 사건을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하는 시간을
민주화 세력이 총체적인 역량을 규합하기에는 너무도 짧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국민주주의는 위기에 봉착하게 됐다. ‘서울의 봄’ 당시 가장 강력한 결집세력이었던 대학생들이 급변하는 사태의 와중에서 학생운동 지도부의 미숙한 경험과 인식의 한계로 나타난 ‘서울역 회군’사건 이후 신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