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남긴 치명적인 오점이라 할 수 있다.
대외정책 분야에서는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선택하였다. 광해군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실리외교로 조선이 전란을 겪지 않았다는 주장들이 많아지고 있다. 지리적인 우위를 다분히 지니고 있는 우리나라는 역대 유목 민족들의 침략을 많이 받아
서론
커다란 꿈을 품었던 비운의 군주 광해군
1.발표의 배경
광해군은 조선의 제 15대 왕으로1608년에서 1623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하지만 비운의 왕이었다. 왕의 모든 자취를 기록하는 ‘~실록’조차 없었고 실록을 대신해 ‘광해군 일기’가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역사 속에서 왕으로 인정받지 못한
외교정책에 있어서 안일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 예로 들면 인조는 즉위 초반 친명배금을 주장하며 전왕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비판하면서 정국에 출범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후금의 경계를 불러일으켜 결국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바로 후금과의 화친을 맺게 되었다. 후금과의 화친이라고 하여도 대등
Ⅰ. 개요
변화하는 탈냉전의 동북아 상황에 대처하는 신외교 등은 때로는 상호보완적으로 때로는 상호갈등적으로 작용하였다. 한국의 외교정책의 여러 목표들은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여 남북정상회담의 성과와 대미 동맹외교, 대일 협력외교, 대중․러 외교 등이 상승작용을 하였으나, 미국의 신
대한 압박은 계속되다가 1617년에 이르러 이이첨을 중심으로 폐모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사실 광해군은 인목대비에 대해 신하들이 끊임없이 시비를 걸어와도 응하지 않았다. 같은 대북인이었던 정인홍은 역시 이때에도 전은론(全恩論)을 펼치면서 국모에게 벌을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폐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