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남긴 치명적인 오점이라 할 수 있다.
대외정책 분야에서는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선택하였다. 광해군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실리외교로 조선이 전란을 겪지 않았다는 주장들이 많아지고 있다. 지리적인 우위를 다분히 지니고 있는 우리나라는 역대 유목 민족들의 침략을 많이 받아
Q. 직무상의 적성과 보수중 어느것을 택하겠는가?
A. 저는 적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보수나 워라벨이 좋다 하더라도 적성이 안맞으면 사기와 의욕도 떨어지고 그만두고 싶은 욕구가 높아지게 됩니다. 제가 알기로는 대기업이나 공기업에서도 신입사원 중에 20%정도는 퇴사를 하고 공무
고대에 있어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해역으로 가로막힌 교통상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지역과 지역을 뛰어넘는 장년의 역사적 교류를 행해왔다. 한반도 삼국이 국가형성을 지향해 나가는 4세기 이후가 되면 지역적 공동체의 단계를 넘어 국가간 외교사의 형태로 발전해 나간다. 한 국가의 외교정책은 그
이루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특히 1946년 3월 있은 처칠의 유명한 '철의 장막'연설 이후 강경한 반(反)소련 정책을 추구하고자 했다.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대소봉쇄정책을 주된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냉전(Cold War)이라는 말은 원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의 미국과 소련간의 대결을
외교정책에 있어서 안일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 예로 들면 인조는 즉위 초반 친명배금을 주장하며 전왕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비판하면서 정국에 출범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후금의 경계를 불러일으켜 결국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바로 후금과의 화친을 맺게 되었다. 후금과의 화친이라고 하여도 대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