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27년 예일대학의 법대학장서리가 되었다.
1928년 학장이 되었다.
1929년 30세 때 시카고 대학교의 제 5대 총장에 선임되었다.
1951년 포드재단의 부총재가 되었다.
1959년 민주제도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이 되었다.
1977년 신장병으로 타계하였다.
2.허친스의 교육 목적
교
대학에서 법학공부에 몰두하여 같은 해 법대교수가 되고 1928년 법대 학장이 된다. 1928년 시카고에서 미국의 법대 학장들과 교수들이 가진 학술회의에서 허친스는 당시의 미국 법학교육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의 연설에 감명을 받은 시카고대학의 총장서리를 통해
교육사상 체계를 갖추어 진보주의 교육의 약점을 비난하는 일파가 나타났다. 이것이 본질주의라고 하는 교육사상이다. 또 한편으로 본질주의자들의 진보주의 교육에 대한 공격이 철저하지 못함을 불만으로 여긴 일파가 있다. 이들은 시카고 대학 총장 허친스(R.Hutchins)를 중심으로 진보주의 교육의 이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교사가 부과하는 시험과 과제 등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다는 것이다. 허친스는 16세 때 Oberlin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아버지가 수학을 싫어했으므로 그 영향을 받아 일생 동안 수학을 공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철학사 강의를 들었지만 교과서의 표지가 녹색이
오늘날 대부분의 모든 나라의 학교들은 그 종류와 수준에 관계없이 기본적인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사회적 기능들이 비효율적인 학교교육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해방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육계는 외국교육사사의 민감한 영향하에 여러 교육사사이 도입되었다. 특히 초기에 듀이(Dew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