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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산신성비보다 더 오랜 이두 금석문(金石文)으로는 평양성벽석각(平壤城壁石刻(446))과 은합간(銀合杆(451))이 전해진다. 이러한 이두는 6~7세기경 그 표기법이 고정되고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나 소송문, 고시문, 보고서 등의 관용문에서는 조선후기까지 사용되었다.
훈민정음을 창제해 국어를 전면적으로 표기함에 따라, 비로소 국어의 모습을 자세하게 체계적으로 알 수가 있게 되었다. 훈민정음창제 이후 한글 역시 변화를 겪는데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문자체계상의 차이 외에 표기법 자체의 혼란을 겪다가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거쳐 『한글 맞춤법』의 제정
국어 어휘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1) 『훈몽자회』범례(凡例)
범례는 10조로 된 본문과 '언문자모', '평상거입정위지도'(平上去入定位之圖)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범례 10조는 『훈몽자회』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알아 두어야 할 편찬상의 제반 원칙을 담고 있고, '평상거입정위지도'는 성
훈민정음을 창제해 국어를 전면적으로 표기함에 따라, 비로소 국어의 모습을 자세하게 체계적으로 알 수가 있게 되었다. 훈민정음창제 이후 한글 역시 변화를 겪는데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문자체계상의 차이 외에 표기법 자체의 혼란을 겪다가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거쳐 『한글 맞춤법』의 제정
훈민정음을 창제해 국어를 전면적으로 표기함에 따라, 비로소 국어의 모습을 자세하게 체계적으로 알 수가 있게 되었다. 훈민정음창제 이후 한글 역시 변화를 겪는데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문자체계상의 차이 외에 표기법 자체의 혼란을 겪다가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거쳐 『한글 맞춤법』의 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