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기처(軍機處)·총리아문의 대신으로 내치·외교의 최고권력을 장악하고, 증국번(曾國藩) 등을 채용하여 태평천국의 난 등 여러 내란을 진압하고 전통적 체제를 회복하여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는 말을 들었다.
내외에 평화가 회복되자 서태후로부터 경원되어, 1865년 의정당대신에서 물러나고
군기처(軍機處)·총리아문의 대신으로 내치·외교의 최고권력을 장악하고, 증국번(曾國藩) 등을 채용하여 태평천국의 난 등 여러 내란을 진압하고 전통적 체제를 회복하여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는 말을 들었다.
내외에 평화가 회복되자 서태후로부터 경원되어, 1865년 의정당대신에서 물러나고
군기처(軍機處)가 신설되자 실권은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건륭 초기에는 독립된 기관으로서 군사국무의 최고 권한을 겸하였다. 정무집행기관은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 등 6부와 대리시(大理寺) 이하의 5시(寺), 감찰기관인 도찰원(都察院), 그 밖에 한림원(翰林院)국자감(國子監), 흠천감(欽
군기처(軍機處)가 신설되자 실권은 그 곳으로 넘겨졌으며, 건륭 초기에는 독립된 기관으로서 군사 국무의 최고 권한을 겸유하기에 이르렀다. 또 이번원(理藩院)이 신설되어, 몽골 신장[新疆] 시짱[西藏] 등 소위 번부(藩部)의 일을 관장하였다.
서양 제국과의 교섭도 당초에는 그 밑에서 조공국(朝貢國)
군기처(軍機處)가 신설되자 실권은 그 곳으로 넘겨졌으며, 건륭 초기에는 독립된 기관으로서 군사 국무의 최고 권한을 겸유하기에 이르렀다. 또 이번원(理藩院)이 신설되어, 몽골 신장[新疆] 시짱[西藏] 등 소위 번부(藩部)의 일을 관장하였다.
서양 제국과의 교섭도 당초에는 그 밑에서 조공국(朝貢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