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끊고 일본이 조선에서의 우위를 차지하려는 저의가 담긴 것이고, 제7조는 군사작전시의 상륙지점을 정탐하려는 것이었다. 이후일본의 적극적인 조선진출을 견제하려는 청국의 주선으로 미국과도 통상조약을 체결하고(1882),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과 우호통상조약을 맺음으로써 세계자본주
청과 일의 서양에 대한 협력은 일본의 경우는 서구열강 중에서도 특히 제정러시아에 대한 위협에 대응한 것이었고, 청의 경우는 아편전쟁이후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것이었으나 1860년 청․러의 북경조약체결 이후에는 제정러시아가 주된 경계의 대상으로 대두되었다.
일본의 제정러시아에 대한
일본이 1854년 미국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었으며, 중국은 1840년 아편 전쟁에서 영국에게 굴복한 후에 1856년 애로 호 사건의 결과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에게 굴복하였고, 러시아는 연해주를 확보한 후 두만강을 넘어 한국으로 침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
갑신정변기
우리나라는 운요호 사건 이전에도 미국,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의 침략을 당했지만, 버텨냈다. 즉, 쇄국주의를 유지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1875년에 일본이 6척의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로 왔고 우리 육군은 이에 경고로 함포사격을 했다. 이에 일본군은 대응사격을 실시하였고 우리
사회적 정치적 혼란은 정부의 능력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정부 자신이 국내적 내란을 스스로 진압하지 못하고 외국군의 간섭을 불러들임으로써 이러한 외국군의 간섭이 바로 직접적으로 강대국들의 전쟁을 유발하게 했던 것이다. 청일전쟁(1894-95)이 발생하게 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