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일본 및 남한 학계에까지 어느 정도 파급 효과를 남겼다. 갑신정변과 김옥균에 대한 평가 및 연구방향은 1958년 3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회 때 행한 김일성의 연설로 또 한 번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다른 나라에는 모두 부르주아 혁명이 있었는데 왜
연구는 모두 사적 유물론적 방법을 취하고 있다. 해방이후 북한학계에서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서술한 최초의 통사는 『조선민족해방투쟁사』 조선 역사 편찬 위원회 편, 1949.10
이다. 이 책에서는 갑신정변을 “봉건국가를 근대국가로 건설하려는 최초의 개혁운동”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일본제국주의
일본이 명치 유신 이후 입헌을 통해 절대주의 천황제를 확립하여 이를 배경으로 번벌(藩閥)관료 중심의 근대화를 이륙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일본과 조선의 권력구조의 전통아 판이하게 다른 만큼 양자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개화파가 실제로 왕권에 의존하려
달리 나타났다. 한쪽에서는 농민군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의 변혁을 추구하였고, 한쪽에서는 제도 개혁을 통한 개량적 방법으로 근대적 국가를 형성하려던 세력의 일부가 일본과의 일정한 관련 속에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또한 그 개혁의 추진 방법과 세력의 형성도 매우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었다.
북한 역사학에 대한 체계적 인식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 발표에서는 북한의 역사학과 역사인식에서 중요한 유물사관과 주체사관 그리고 북한의 역사연구 방법론 변천사를 살펴볼 것이며 분단이 된 후 남한과 북한의 역사인식차이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김유신, 김옥균과 같은 역사인물의 평가를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