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의 가계는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 때부터 신라에서 군인으로 벼슬하였는데,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서로 치열하게 다투는 시기에 태어난 김유신은 609년 15살에 화랑이 되어 화랑도인 용화향도를 이끌고 산천을 주유하며 심신을 수련했다.
낭비성 전투
629년 음력 8월 김유신은 진평왕의 명령
시켜서 본국의 왕에게 알렸는데, 왕이 대장군(大將軍) 김유신(金庾信)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김]유신이 행군하여 한강(漢江)을 넘어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들어가자 고구려의 왕이 이를 듣고 [김]춘추를 놓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선덕왕(善德王)
백제군들에 대한 병사들의 적개심 바싹 올리도록 해라."라고 김유신장군이 두 병사에게 지시를 하면, 두 병사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백제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아군이 백제군에게 적개심을 갖도록 한다. 특히, "이 좁은 땅에서 우리 후손들이 편하게 살려면 한쪽은 망해야 하는 게야."라
백제 부흥국에 대해서 삼국사기와는 다른 일본서기의 인식은 백제와 왜 간에 전통적으로 긴밀한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백제 부흥국과 관련된 기사에서 삼국사기 문무왕 11년조에 수록된 문무왕이 당나라 장군 설인귀에게 보내는 답서의 기사를
백제의 멸망:백제는 신라와 분쟁을 계속하여 642년 신라의 40여 성을 공략하자, 신라는 위기에 처하고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그 뒤 당나라가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660년 소정방(蘇定方)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 김유신의 5만 병력과 합세하였다. 계백의 용전도 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