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을 무게 있게 받아들인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서방의 전문가들이 김일성을 민족해방의 영웅으로 묘사하는 북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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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김일성국방위원장(김일성 주석)의 연혁
노동당 창당 후 민족지도자 대거 숙청 한반
독립운동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래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독립운동은 기껏해야 ‘복국(復國)’, ‘복벽(復僻)’에 그쳤다. 새로운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체제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은 1919년 3․1운동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기되었다. 물론 이 운동은 일제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혔
김일성 가짜설의 주요 근거로 내세운다. 또한 숙청당한 박금철의 증언과 남로당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 김성주가 항일운동을 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는 서대숙(徐大肅) 등의 말에 따르면,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 직후 현상금이 1만 엔으로 오른 일(항일 단체의 위원장급
사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치열한 혁명투쟁과정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마오쩌둥사상은 징강산 유격투쟁, 장시 소비에트 임시정부 수립, 대장정, 국공합작과 항일전,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그 내용에는 마오쩌둥이 전개한 유격전술,
사상의 대두
김일성은 1964년 소련에서 흐루시초프가 축출되고 1966년 중국에서마오쩌둥과 당권파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꼈다. 1967년 김일성은 국방우선론을 내걸고 군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다음, 경제건설 우선론을 주장하는 당내 2인자 박금철을 비롯하여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