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징이다.
에도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등 강호문학의 성격을 가진 작품이 있기는 했지만 사대부들이 진정으로 강호를 동경하고 산림에 파묻혀 그 속에서 시조문학을 산출하기 시작한 것은 16C 이후의 일이었다.
16․7C의 시조작가는 사대부들이 대부분이므로 이 당시의 시조문학은 사대부 문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범위 내에서 중인가객들에 의해 편찬된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 삼대 가집에 대한 서지학적 내용을 살펴본 뒤 시기와 맞물려서 달라지는 중인가객들의 연행 유형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대표적인 중인가객들의 작품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러기 위해 훈민정음을 선택하게 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밝힌 것이다.
퇴계의 이러한 태도는 바로 율곡으로 이어졌고, 드디어는 송강과 같은 대시인이 출현하여 한국 언어 예술은 그 분령을 거의 회복하게 되었다.
퇴계 전후에도 우리 시가에 있어서 노랫말과 기록 수단의 일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그리는 <사미인곡>과<속미인곡>에서 잘 나타난다. 전기가사의 작가층인 사대부들은 미의식을 문학으로 형상하고자 노력하였다.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에서 정철이 숭고미를 중심으로 하여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빚어지는 갈등으로 인한 슬픔을 초극하고자 하여 나타낸 비장미를 통해 사대부들의
그 과정을 이루는 몽유 속에서의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 시켜 보여주며, 이어 그 욕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작가는 불교의 소재를 차용했으면서도 그 소재적 원천을 토대로 다시 문학세계에 재해석 해놓았다. 작가 개인의 개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당대 사회의 현실 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