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전쟁의 주역인 전봉준 등은 이미 삼례집회 때부터 공식적으로 이름을 드러내고 일단의 세력을 형성하여갔으며, 또 이를 통해 교조신원과 동학의 종교적 자유, 동학교도에 대한 지방관의 탐학 금지 외에 보다 정치적 구호인 외세배격의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1893년 동학교단 북접에서 준비한 복
Ⅰ. 갑신 정변
1. 개화파와 갑신정변
조선 후기에 들어와 중국의 양명학, 훈고고증학 등 한학의 도입과 성리학에 대한 비판의식이 대두되어 성리학은 조선 전통사회를 이끌어온 지배이념으로서의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경제적 피폐와 관료의 극심한 횡포에 따른 민생고 문제에 대한 반
농민군을 편성하였고 전주에 입성한 단계로 5월 8일에 전주화약이 체결되었다. 이 제 1차 농민전쟁 단계로부터 본격적 농민혁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제 3단계는 갑오농민전쟁의 농민집강소의 단계로 청군과 일본군이 갑오농민전쟁에 개입하자 이 두 나라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하여 농민군과 관군 사이
1. 근현대 민족ㆍ민주운동과 호남의 위상
1-1. 일제 강점기 호남에서의 민중운동
정순제,「호남종횡관(湖南縱橫觀)」: “전남은 과거 갑오운동과 현금의 농민운동의 진원지로서 무산의 소작인들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부터 약자의 무기는 오직 단결뿐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면 단위로 노동단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