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제도, 그리고 바람직하지 못한 교육의 방향과 내용,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역기능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 현 교육의 모습이다. 이러한 혼란함 속에서 향후 우리 교육의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있어 다산이 보여준 교육사상과 청렴상은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생각하기에 다산의 교육사
유배가 풀리기까지 18년 간 그는 경사에 걸친 전 학문을 체계화였으며, 이때부터 정치 경제적 인식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경서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학문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다가 1836년 2월 22일 고향 마현의 자택에서 75세를 일기로 자신의 저작물을 수록하였다.
유배가 풀리기까지 18년 간 그는 경사에 걸친 전 학문을 체계화였으며, 이때부터 정치 경제적 인식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경서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학문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다가 1836년 2월 22일 고향 마현의 자택에서 75세를 일기로 자신의 저작물을 수록하였다.
정약용은 그를 목자(牧者)라 한다. 그러므로 유가(儒家)에 있어서의 군자-성자-목자는 본시 교사(敎師)인 것이다.라 했듯이 교사상을 목민심서에서 나타난 목자상과 정약용의 사상을 통하여 찾아보고자 한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우리나라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교육사상가 및 실천가 중 1명을
Ⅱ. 본론
1. 다산정약용의 생애
정약용은 영조 38년 서울 근교의 마현에서 태어났다. 자는 미용, 호는 다산 혹은 사암, 당호는 여유당, 시호는 문도 이다.
14세에 호조좌랑으로 등용되는 부친을 따라 서울에 와서, 16세에 성호의 글을 읽고 실학에 심취하게 되었고, 23세에는 이벽으로부터 그리스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