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신라 천년의 고도이며, 6?25의 전화를 피한 곳이어서 수많은 유물 유적을 간직하고 있어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중 국보 23점, 보물 45점, 사적 52개소, 사적 및 명승 2개소, 중요 민속 자료 3종이 있다. 경주시 일원의 유물 유적은 크게 고분 및 그 유물, 불교관계 문화재,
신라가 왕권국가로서의 체제를 제대로 갖추게 되는 것은 지증왕(智證王)과 법흥왕(法興王) 때에 이르러서이다. 지증왕(500~514년) 때에는 마립간(麻立干)대신에 중국식 왕호(王號)를 사용하여 왕위세습 및 정치체제를 확립하였고 한편으로는 우산국(雨傘國)을 정복하여 대외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경주가 터를 잡은 지역은 한국의 대부분의 도시가 그러하듯이 산과 물을 끼고 있는 이른바 背山臨水의 분지지형이다. 동서남북으로 해발 300-500m의 낮은 山稜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산과 산 사이는 하천이 흐르고, 충적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사통팔달의 도로가 발달되어 있다.
따라서 경주의 시각구조는
세계 어느 나라나 각기 자국의 문화유산의 보존 전승을 위해 나름의 방법을 동원, 심혈을 기울인다. 지상에 나타난 문화유산이나 동산의 문화유산은 실체가 있어 큰 문제는 없지만 지하에 묻혀 있는 매장문화재의 보존이 항상 문제를 안고 있다. 지하에 있기 때문에 발굴조사나 기타 방법으로 확인되지
오늘에 이르는 흥망성쇠의 유서 깊은 역사와 간절한 전설이 서려있고, 때로는 젊은이들의 심신 수련장이였으며, 나라를 지키는 간성이 되기도 하고, 백성들의 영험 있는 신앙지이며, 불교의 성지였다. 그리고 지금은 신라 천년 역사의 증인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문화재와 같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