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에서는 1988년에야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겉으로 보여 지는 정치적인 코드보다는 그 안에 숨어 있는 문화적 저항의 코드로써 이 작품을 고찰해 보고 싶다. 이 장에서는 찰리채플린의 영화들 중 한 편을 보고, 그 영화의 영화사적 의미와 그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기로 하자.
대중에게 가장 널리 얼굴이 알려진 그리고 지금도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감독이다. <사이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새>와 같은 히치콕의 대표작들은 끊임없이 TV에서 방영되고 있고, 히치콕 영화에 대한 논문의 제목을 모아놓은 책이 따로 발간될 정도로 학계에서도 지속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생
시대적으로 빨랐으나 영화의 시작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에디슨의 것이 대중을 대상으로 상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프랑스의 L.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라프라는 촬영기와 영사기를 발명하여 1895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영화를 공개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영화의 효시라 여긴다.
수도 지난해에 비해 줄었다. 올 1분기 관객 수는 3,431만 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3,820만 명보다 10.3% (389만 명) 감소했다. 다만 지난해 아바타(2010년 831만명동원)와 같이 시장 규모 증가에 크게 이바지 한 빅히트작이 부재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2011년 1분기의 전반적인 성적이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대중적 혹은 집단적 방식으로 정신 오락적인 분산적이고 촉각적 지각 방식이 요구된다. 아우라의 몰락으로 기술재생산 시대의 대중 문화의 특징은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에 있어 아우라는 어떻게 출현하는가? 더군다나 아우라의 상실을 초래했다는사진예술에 있어 아우라는 과연 존재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