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에는 새로운 인력 공급이 극히 적었다. 1945년 해방 당시의 임정 요인이 거의 1919년 임정 수립 당시의 인물이었다. 그 인물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물의 공급이 없었다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서 10년 전의 앙금이 그대로 살아 있고 1920년
Ⅰ. 서론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통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1948년 1월 이후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 이전 역사의 산물이었으니, 여기서는 우익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한 통일운동의 배경과 원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검토할 것은 우익진영 자체의 동향이다. 해방 직후
동 본부 또는 지휘부로서의 성격을 갖는 독립당을 전망하는 것으로서, 당시의 실정을 감안하면 민족해방운동의 효율적 실천에 중점을 둔 현실적 방안이었다. 그러나 다수 의견이 형식과 명분을 중시하는 정부수립론으로 기울어졌고, 그 결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도
관계에 있었고 상해, 이르쿠츠크 양파의 파쟁이 미친 여파가 극복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정제달의 국내활동은 성과없이 끝났다.
하고 후신으로 ‘오르그뷰로’를 설치해 조선내 통일된 공산당 조직을 위한 준비를 지시하였다. 코민테른의 이와 같은 결정은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에게 당창건을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