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1906~1907년 동안 격동기의 한국에 머물면서 멸망해 가는 한국사를 목격했다. 『대한제국의 비극』(1908)은 이때의 체험과 자료를 토대로 쓴 것이다. 앞의 책, 역자 초판 머리말 참조
『대한제국의 비극』이 처음 출판되었던 당시, 영국의 맹방(盟邦)이었던 일본을
가해오던 때이기 때문에 그다지 큰 실효성을 거두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이후로 친위연대는 별다른 병화가 없이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규모면에서 양적으로 확대되고 질적으로 정예화 되면서 편제상으로 4천여 명 병력을 유지함으로써 시위대와 함께 중앙군의 부력부대가 외었다.
러시아에 제의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이를 인식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러시아가 일본에 만․한교환을 제안했다고 파악하였다. 본서는 이러한 정세인식이 대한제국의 대외정책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강조했다. 1902년 1월 영일동맹과 3월의 노불선언은 대한제국의 대외정책에 중대한 영향을 주
일본이 이처럼 강력하게 러시아에 대응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1902년에 맺은 영일동맹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영국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이 직접적으로 식민지가 된 동기인 러일전쟁이 1904년 2월 10일 일본의 선전포고로 시작되었으나 일련의 한국 침략에 이토 히로부
전쟁 상의 취약점이 노출 될 무렵,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자로써의 마지막 종지부를 찍게 된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려는 영국과, 삼국 간섭에서의 치욕을 동맹의 구축을 통해 씻으려는 일본 간의 현실적 이해관계로 맺은 ‘영일동맹(英日同盟)’으로 인하여, 반격의 기회를 노리던 러시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