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독도문제 알리기
두 번째 움직임은 독도를 제대로 외국에 알리자는 것이다. 독도는 우리 땅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안에서만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지적은 뼈아프다. 외국의 메이저 지도 제작 업체나 학계, 인터넷에서 독도는 다케시마나 '리앙쿠르 암(巖)'으로 기
하였고, 또 1954년 8월 독도에 등대를 세워 세계 각국에 통고하는 한편 독도 주변 영해 내의 수자원을 확보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 정부의 조치에 대하여 일본이 1952년 1월 28일 한국에 항의하며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옴으로써 독도문제가 발단되었다.
1.한일간 독도문제가 발생하는 근원적 원인
영유권문제. 한·일 양국간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한일간의 관계에서는 깊은 골이 파여 있다. 우리와 일본사이의 독도와 대마도의 영유권문제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 같은 문제다. 1952년 1월 28일 일본이 울릉도의 부속도서인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한·일 간에 분쟁이
영유권문제. 한·일 양국간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한일간의 관계에서는 깊은 골이 파여 있다. 우리와 일본사이의 독도와 대마도의 영유권문제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 같은 문제다. 1952년 1월 28일 일본이 울릉도의 부속도서인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한·일 간에 분쟁이
반격이 시작되었다.
■ 1950년대 : 우익의 1차 교과서 파동
1953년 - 일본의 재군비와 자위대 창설을 가져온 '이케다-로버트슨' 회담을 계기로 등장한 일본의 재무장은 우익에게 힘을 실어 주며 이전 교과서에서 기술된 '침략'이라는 것을 문제 삼으며 일본의 만행에 대해 정당화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