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일 때 겪으셨던 이야기들을 자주해주셨으며, 임시정부 수립일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에 나는 매년 4월 11일, 할아버지 묘를 찾으며 임시정부 수립일과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다.
할아버지 덕분인지 학창시절, 나는 항일무쟁투쟁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투쟁의 역사에 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물론 한국민족은 이미 1905년 전후부터 일본 제국주의를 한반도에서 추방하기 위해 의병들이 선전을 포고하고 한일무장투쟁을 벌였다. 특히 3.1운동 직후부터의 큰 규모의 독립군의 전투활동과 임시정부의 광복군의 활동은 이미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1) 한국독립군의 창립
일제가 만주침략을 자행한 1931년 9월 18일 당시 동북변방군 사령관 장학량의 군대는 일제 관동군보다 숫 적으로 우세하였다. 그러나 장학량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쟁 회피 소극적 대책에 동의하여 처음에는 무저항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1932년 만주국을 세우자 만주군
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이들 흐름이 각각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 운동의 전개에서는 기여적 측면이 강했으며 실제로 이 두 흐름의 교차 속에서 독립운동의 구체적 표출이 행해졌다. 특히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큰 것이었다. 사회주의
투쟁의 중심무대가 된 곳이다. 특히 독립운동사에서 큰 줄기를 이루는 서북 간도를 중심으로 한 남․북 만주에서의 한민족해방투쟁사는 이 일대에 형성된 대규모 조선인 사회를 바탕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만주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