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제출케 하고 만주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의 중앙정부와 청국(淸國)사이에 정식 외교적인 합의에 의하여 이루어진 조치는 아니었고, 다만 지방관이 중앙 관료와 논의하여 실시한 잠정적인 편법이었다.
발표하지 못했으므로 강경애의 문학은 곧 간도문학이었던 셈이다. 이 시기에 강경애는 또 약간의 시와 수필도 발표했다.
③ 강경애의 삶과 당시 ‘간도’라는 지역이 만나 만들어 낸 작가의식
강경애의 삶과 작품세계는 식민지 현실, 그리고 좁게는 간도 정세의 변화와 긴밀한 연관관계에 있다.
청년당(1918) : 김규식을 따라 강화 회의에 대표로 파견
연해주
- 블라디보스크에 신한촌 형성
- 권업회 조직(자치 기구), 대한 광복군 정부 수립(1914)
미주
- 대한인 국민회(1910) : 미주 지역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 단체로 성장
- 대조선 국민 군단 : 박용만이 하와이에서 결성 -> 군사 훈련 실시
지역명칭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른바 일본 천황에 직예한 조선 총독부가 최고의 통치기관이 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설치
8월 29일 공포함과 동시에 일제는 한반도에 새로운 식민지 통치 질서를 제도화하기 위한 입법으로 ‘한국의 국호를 고쳐 조선으로 칭하는 건’과 ‘조선 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
만주로 이동해 들어갔다. 두 번째 배경으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으로 망명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애국지사 가운데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은 신민회(新民會)의 회원들이었다. 이들 신민회 회원들은 1909년의 비밀회의에서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설정하고, 그곳에 군관학교를 창설하여 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