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미국과 프랑스․독일이 있으며, 1905년까지 제국주의의 국제 대립의 중심은 동아시아에서의 러시아와 영국 간의 항쟁에 있었다. 그러나 러ㆍ일 전쟁 후 러시아는 후퇴하고, 다시 그 진로를 발칸․중근동으로 향했기 때문에, 이후 제1차세계대전 발발까지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 대립의
러시아는 같은 슬라브 국가인 세르비아 보호를 명목으로 다음날인 7월 29일, 자국 군대에 대한 총동원령을 내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함에 따라 동맹관계인 독일 제국 또한 자동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와 동맹관계인 프랑스 또한 전쟁에 자동 참전하게 되
세계정책’이 구상되었다.
러시아가 요구한 재보장 조약은 갱신되지 않았으며, 오스트리아와의 동맹 관계를 기초로 한 중유럽 구상이 제1차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독일의 대외적 관계의 핵심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 외교는 그 뒤 15년간 한편에서는 러시아의 영국과의 동맹을 차단하면서
밖에 떨어지지 않은 산 스테파노(현재의 에실쿄이)에 도착한 러시아 군대의 진격에 버티지 못하자, 러시아는 술탄에게 가혹한 조약을 제시했다. 오직 서구, 그중에서도 영국의 개입만이 터키를 총체적 난국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고, 1878년 베를린 조약은 또다시 오스만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러
영국해협에서 스위스에 이르는 전선은 이후 3년간 거의 답보상태에 들어갔다. 그것은 주로 새로운 전쟁 과학기술의 발달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철조망·기관총·독가스 등이 새로운 무기로 등장하였다. 본래 미국 서부 대평원의 목장에서 사용된 철조망은 1차 대전 참호전에서 중간지대에 설치하여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