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이 창도되어 농민대중 속에 침투되자 동학의 반봉건사상과 민족주의적 반외세사상은 농민대중을 크게 고무시켜 동학에 적극 호응하게 하였다. 결국 수백만의 농민이 참가하여 봉건사회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했던 동학농민운동의 투쟁은 비록 일본과 손을 잡은 정부에 의해서 좌절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만석신보(萬石新洑)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쌓게 하고, 가을에 수세(水稅)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을 다하였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고부군민은 학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동학의 고부접주(古阜接主)로
Ⅰ. 동학농민운동
갑오농민운동(1894)은 조선 말기에 자주 일어난 민란 중 전국적 범위의 가장 큰 농민반란이었다. 이 투쟁에는 동학당이 선두였기 때문에 동학란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나 실은 농민전쟁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투쟁에 참가, 동원된 절대 다수가 농민(특히 빈농)들이었고 또
농민의 부담으로 이전되어 농민층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한편 개항 이후부터 1894년까지 중국은 양무운동으로 근대화를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었고, 일본은 명치유신으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 나아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이러한 양국은 조선을 각축장으로 삼았고, 특히 대일곡물수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