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들은 봉건적인 폐정을 개혁하려는 의도 아래 보다 확대된 민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여기에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은 바로 안핵사의 폭압이었다.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빌미로, 요호부민들을 잡아다 난의 주모자로 몰고 봉기한 농민들을 모두 동학폭도로 몰아 처벌하는
농민전쟁의 제 1차 농민혁명의 단계이다. 1894년 음력 3월 20일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의 지도하에 茂長(무장)에 남접도소를 설치하고 봉기를 준비하여 약 4천명의 동학농민군을 편성하였고 전주에 입성한 단계로 5월 8일에 전주화약이 체결되었다. 이 제 1차 농민전쟁 단계로부터 본격적 농민혁명운동
전봉준 등 남접 세력들은 사회변혁을 위해 동학교단 상층부를 움직이는 것에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남접 또는 전라도 고부라는 한 고을의 농민무장봉기로 그 방향을 바꾸어 추진하였던 것이다.
1893년 고부는 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수탈 그리고 전운사 조필영, 균전사 김창석의 탐학까지 가세되어 농
동학농민전쟁 과정에서 일어나 싸움을 벌인 것은 서포라 했으니 서장옥 호 일해. 수원 사람이라 전해진다. 강경 노선을 펼쳐 온건한 교단 지도부와 자주 마찰을 빚었으며,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전봉준을 제자로 거느리고 새로이 ‘남접(南接)’이라는 세력을 구축하였다. 농민전쟁시기 감옥에 있었
전쟁도발에 나서게 되고 민족적 위기를 의식하게 된 농민군들은 반외세항거와 지켜지지 않은 폐정개혁안에 대한 반발로 다시 한번 2차 봉기를 한다.
민족적 위기와 봉건적 위기를 중첩하여 직면하게 된 상황에서 동학이라는 종교가 농민들과 만나게 되었다. 종래의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의 관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