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골의 생애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은 1809년 5월 1일, 남러시아 우크라이나 지방의 폴타바 주 미르고로드 군의 벨리키 소로친쯔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우크라이나 지방은 지금과는 달리 소러시아라 불리고 있었습니다. 19세기에는 현재의 러시아 지역은 대러시아, 우크라이나 지역은
고골의 할아버지는 우끄라이나 귀족 태생의 여인을 납치하여 비밀결혼을 했고, 나중에 그녀가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온 재산이 바로 고골이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마을 바실리예프카였기 때문에 고골은 자신의 가문에 대하여 그다지 긍지를 갖지 않았다.
고골은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라
고골『외투』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 이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이야기한 것으로 19세기의 고전적인 시각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로 유명하다. 슬라브주의자의 대표적인 러시아 문학의 대가 도스토예프스키가 고골의 ‘외투’에 대하여 이러한 평가를 내린 것에는 과연 어떠한
러시아정책을 지배하고 있는 3가지 부류의 환상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다. 경제발전이 정치변화를 가져온다는 경제결정론, 권력현실을 외면한 소박한 기대, 러시아일반에 대한 치유할 수 없는 낭만주의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부시행정부가 앞의 2가지 환상에 지배했던
러시아의 정교회를 통한 구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또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어째서 그들(죄수)들은 모두가 그토록이나 소냐를 사랑하는 문제이다.…(중략)…그녀가 라스콜리니코프를 찾아 노역장에 나타나거나 작업하러 나가는 죄수의 무리와 얼굴을 마